벌써 중국이 몇번 째이냐?? 중국의 시작은 2000년(?) 베이징과 만리장성 패키지!! 그리고 2006년 상해, 황산, 난징, 수조우, 항조우를 둘러보았던 마눌과의 첫 중국 자유여행!! 이후 중국여행은 우리의 관심 밖이었다. 왜?? 여행하기 힘들고, 더럽고, 복잡하고, 질서도 엉망이고!! 더 결정적인 이유는 먹거리의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중국은 우리의 여행계획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런 중국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것이 언제일까?? 2년 전, 칭다오 여행에서부터 중국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중국이 달라졌다. 중국이 깨끗해졌다. 아직 사람들의 문화, 습관이 불편한 것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과거의 중국이 아니다. 변했다!! 그래서일까??!! 칭다오 이후, 우리의 3-4개월마다의 해외여행은 중국으로 굳어졌다. ㅋㅋㅋㅋ
칭다오(청도/靑道) - 시안(서안/西安) - 샤먼(하문/하廈門) - 광저우(廣州市) - 청두(成都) - 구채구, 황룡까지!! 벌써 5개의 도시를 탐방했다. ㅋㅋㅋ 우리는 아시아나 마일리지 항공권으로 중국을 여행 중이다. 아시아나가 취항하는 도시는 다 갈 수 있다. 올해 12월 대한항공과 완전 합병된다는데 ~~~ 더 갈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될까?? 여름 휴가 - 하얼빈 / 추석연휴 - 충칭까지 예약이 되어 있다. 구이린(계림/桂林)을 가보고 싶은데 ~~~ 12월 전에는 기회가 안될 듯!! 합병 이후 대한항공이 취항하나?? 기다려 보자!!
하얼빈의 주요 관광지
1. 하얼빈 중앙대가
2. 성 소피아 대성당
3. 스탈린 공원
4. 송화강케이블카
5. 하야오6 판화박물관
6. 메이플 온천
7. 하얼빈 역 - 안중근의사 기념관
8. 731부대 흔적
어쨌든 여름 휴가는 하얼빈이다. 시간 나는대로 준비를 좀 해보자!! 아는 만큼 본다는데 ~~~ 이번엔 잘 준비해보고!! 머 ~~~ 안되면, 된만큼만 보고!! 하얼빈에서는 멀 볼 수 있을까?? 검색을 해보니 가장 먼저 이게 눈에 들어온다.
1. 하얼빈 중앙대가 - 르네상스 및 바로크 양식의 러시아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는 보행자 전용 쇼핑거리
하얼빈 중앙대가의 밤거리는 낮보다 조금 더 유럽풍으로 바뀝니다..붉은색 가로등과 유럽풍의 건물들의 조화와 오래된 건물에 들어선 KFC 치킨집은 분위기를 색다르게 합니다. 빙등제에 맞춰 중앙대가 거리에도 많은 얼음 조각상들이 있는데 이 역시 볼거리 이고..유명 러시아식 토마토스프를 파는 레스토랑과 꿔바로우로 유명한 레스토랑..약간 골목쪽에는 맛있는 소룡포가 있는 등등의 맛있고 유명한 레스토랑도 접할 수 있습니다..중앙대가의 끝에 조각상에는 밤에 라이트쇼도 이뤄집니다.
하얼빈 중앙대가는 ‘동방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불릴 만큼 러시아풍의 정취가 짙게 느껴지는 거리예요. 약 1.4km 길이의 보행자 거리를 따라 유럽풍 벽돌 건물과 고딕 양식의 상점들이 줄지어 있어서 걷기만 해도 마치 러시아 여행을 하는 듯한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어요. 거리 곳곳에서는 러시아식 소시지, 아이스크림, 꿀호떡, 보르시치 수프 등 하얼빈만의 독특한 먹거리도 즐길 수 있고, 기념품 숍이나 예술 소품 가게를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해요. 또한 송화강 유람선 탑승이나 성 소피아 성당까지 이어지는 산책 코스 등 즐길거리도 다양해 하루 종일 머물러도 지루하지 않아요. 특히 겨울이 되면 거리 전체가 반짝이는 조명과 눈꽃 장식으로 물들어 ‘얼음과 눈의 도시’라는 하얼빈의 별명을 실감할 수 있는 낭만적인 여행지로 변한답니다.
/ 주변 - 소피아 광장, 스탈린 공원, 방홍 기념탑, 하얼빈 박물관을 추천드려요.
2. 성 소피아대성당 - 1907년에 건축된 비잔틴 양식의 러시아 정교회 대성당
하얼빈을 상징하는 대표 랜드마크인 성 소피아 성당은 러시아 비잔틴 양식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건축물이에요. 붉은 벽돌과 푸른 돔이 인상적인 이 성당은 1907년에 지어져 오랜 세월 동안 하얼빈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해 왔답니다. 내부에는 고풍스러운 샹들리에와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어 낮에는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고, 밤에는 은은한 조명이 어우러지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요. 하얼빈 중앙대가에서 도보로 단 5분 거리에 있어 꼭 한 번 들러볼 만한 필수 코스예요.
하얼빈 성 소피아 성당 바로 앞에 위치한 소피아 광장은 여행객은 물론이고 현지인들에게도 사랑받는 도심 속 휴식 공간이에요. 낮에는 거리 공연과 노천 카페를 즐길 수 있고, 밤에는 성당의 불빛이 광장을 비추며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죠. 겨울이 되면 눈으로 덮인 광장 위에 크리스마스 트리와 조명 장식이 펼쳐져 포토존으로도 인기가 많답니다.
3. 스탈린 공원
스탈린 공원은 송화 강변을 따라 조성 공원으로, 약 1.7km 길이의 산책로를 따라 가로수와 벤치가 늘어서 있어요. 하얼빈 중앙대가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해서 중간에 들러서 잠시 휴식을 취해 보시는 것도 좋아요. 특히 일몰 무렵이 아름다운 곳이니 꼭 한 번 들러보시길 바랍니다.
스탈린 공원 중앙에 위치한 방홍 기념탑은 높이 약 22.5m 높이로 1958년 홍수 방어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어요. 탑의 꼭대기 위로 올라가면 송화강과 도시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답니다. 하얼빈 중앙대가와 가까운 편이라서 들러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4. 송화강 케이블카
쑹화강 케이블카는 하얼빈 도심과 태양도 공원을 잇는 하늘길로, 송화강 위를 가로지르며 도심 전경을 감상할 수 있어요. 특히 일몰 시간대에는 하얼빈의 황금빛 야경을 감상할 수 있어 로맨틱한 추억을 쌓아보실 수 있어요. 쑹화강 케이블카 티켓은 트립닷컴에서 미리 예매해두면 훨씬 저렴하고 편리하다.
5. 하야오6 판화박물관( 哈药六版画博物馆) - 주소 : 黑龙江省哈尔滨市道外区南直路326号
하야오6 판화박물관넓은 면적에 프랑스 건축을 모델로 하여 하얼빈 지역의 건축 특색을 결합하고 현대적인 디자인 개념을 도입한 이곳은 고전주의, 바로크, 로코코 등 다양한 건축 양식을 한데 모았습니다. 관내에서는 수백 점의 유명 화가들의 판화와 러시아 유화, 판화 작품을 관람할 수 있으며, 특색 있는 건축과 역사 문화, 회화 예술이 결합되어 독특한 관람 경험과 감동을 선사합니다.
6. 메이플 온천
메이플 타운 온천 리조트는 하얼빈 메이플 타운 아울렛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실내 온천 구역에는 38개의 온천 욕조가 마련되어 있고 6,000㎡가 넘는 힐링 센터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천장 디자인과 실내 장식, 정교하게 설계된 조명 효과를 통해 따뜻하고 편안하며 고급스러운 휴식 공간을 조성했습니다. 여기에는 아이스 & 파이어 풀, 장미 꽃잎 풀, 오행(五行) 풀, 피시 스파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진 수십 개의 특별 풀이 있습니다.
독일의 카라칼라 스파는 정다각형 목조 정자의 독특한 구조로 실외 온천과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져 있습니다. 첨단 심층 휴식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초음파 욕조, 좌욕, 오리 부리 충격 욕조, 소용돌이 충격 욕조, 폭포식 충격 욕조, 발바닥 침 마사지 등이 제공됩니다. 이곳에서 바쁜 도시 생활을 잊고 마음과 몸을 완전히 이완시킬 수 있습니다.
스파관의 원형 홀은 사면이 유리 커튼월로 되어 있어 환경이 깔끔하고 투명하며 무한한 푸른 공간을 연출합니다. 이곳에서 목욕을 하며 멀리 바라보면 마음과 몸이 깊이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7. 안중근의사 기념관
| 초기 활동 안중근은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안중근은 어렸을 때부터 사냥을 좋아했다. 또한, 서당 공부를 빼먹고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이렇게 차분히 앉아있는 날이 드물자 할아버지는 원래 이름인 응칠 대신 '무거울 중'에 '뿌리 근'자를 써서 중근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수는 영특한 셋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일가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안중근도 가솔을 따라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10권까지만 배웠다고 한다. 안중근 자신은 《안응칠역사》에서 "내 나이 예닐곱 때 조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서당에 들어가 8~9년 동안 한문을 익혔으며, 조부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사냥으로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고 술회하였다.[8] 소년기 동학 농민군 진압 활동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을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정평이 났다. 아버지 안태훈은 산채에 개인적으로 사병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고 그와 함께 백성을 괴롭히는 동학 농민군이 각지에서 동학도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하자 안태훈은 자발적으로 창의를 하고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여[출처 필요] 승리를 거뒀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 진압작전을 펼치자 소년 안에 안중근 역시 동학군 토벌에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하는 데 참여했다. 김구가 동학군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안태훈이 김구를 보호한 적이 있으며 그 시기에 안중근도 그와 안면이 있었으나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 입교 안중근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신앙심이 독실하였고[9],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배웠다. 1897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프랑스 출신의 천주교 신부였던 조제프 빌렐렘(Joseph Wilhelem, 한국명 홍석구(洪錫九))으로부터 토마스(도마, 다묵(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안중근이 홍석구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는 설명도 있지만, 안중근은 홍석구 신부와 함께 뮈텔 주교와 만나 이야기를 한 후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안중근》(조정래 지음, 문학동네)에 의하면, 뮈텔 주교(한국이름 민주교)가 조선사람들이 학문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문을 하면 머리가 깨일 것이고, 머리가 깨이면 천주교 교리와 신앙에 대해 나름대로의 논리와 비판으로써 의문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면서 실망한 안중근은 프랑스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그 뒤 잠시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萬人契: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 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청인 난타 사건 1904년 아버지 안태훈과 청나라 의사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휘말렸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아버지 안태훈은 1904년 4월 20일 안악읍에 사는 청나라 의사 서원훈(舒元勛)과 시비가 있었다.[10] 아버지 안태훈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친우 이용일(李龍一)을 데리고 서원훈을 찾아갔다. 양측이 필담을 나누는 사이에 안태훈측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서원훈이 갑자기 일어나 안태훈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이에 안태훈은 서원훈에게 화해를 청하고 물러나왔다.[10]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이 4월 29일 이용일 등 10여 명과 함께 무기를 들고 야밤에 서원훈을 잡아다가 길가에서 무수히 난타하여 거동이 어렵게 만들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1904년 5월 2일 청국인 7~8명이 이용일의 집에 난입하여 그를 마구 구타하고 잡아가려고 했다.[10] 한청 양국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삼화항의 청나라 영사가 한국 정부에 공식 문제제기를 했다. 이에 따라 삼화항 재판소 감리가 순검을 보내 안중근과 이용일을 체포하여 압송토록 했다.[10] 그런데 중도에 나타난 괴한들이 순검들을 난타하고 안중근과 이용일을 구하여 사라졌다. 이때 순검 한 명은 안면에 총을 맞아 중태에 빠졌다.[10]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7월 10일 전후에 안중근과 이창순은 각기 외부에 청원서를 올려 자신들의 부친이 억울하게 청국인에게 당했다고 호소했다.[10] 그러나 대한제국 외무부는 다시 자체 조사를 거친 끝에 안중근과 이용일의 죄상이 중하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지방 정부는 안중근 등의 체포를 명하였고, 7월 22일 황해도관찰사 이용필(李容弼)은 안중근과 이용일이 기미를 알고 미리 도주하여 체포하지 못했다는 보고서를 외무부대신에게 올렸다. 重根은 明治三十七年(一九◯四) 봄 黃海道 載寧에서 淸國人과 爭鬪한 끝에 그가 携帶한 短銃으로 淸國人을 射殺하였으므로 淸國領事로부터 外部에 交涉하는 바가 되어 事件이 重大하게 되려고 하였으므로 重根은 上海로 逃走하고 父 泰勳은 그 사이에서 當時의 外部大臣 李夏榮에게 哀願하여 간신히 無事할 수 있었다고 한다.[11] 한편 안중근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는 조금 다르게 사건이 소개되어 있다. 안중근이 경성에 가서 외무부에 청원서를 올렸고, 재판이 진남포 재판소에 회부되어서 서씨와 같이 재판을 받게 됐다고 나와있다. 그리고 이 재판에서는 서씨의 만행이 드러나고 안중근이 옳다는 판결이 났다. 이후 안중근은 어떤 청나라 사람의 소개로 서씨와 만나 서로 사과하고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 계몽 운동과 국채보상운동 1906년의 안중근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고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여 실망하고 되돌아왔다. 이 무렵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1906년 3월에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했다. 이사한 곳에서 생계를 위해 한때 석탄상회를 경영하였으나 사업이 되지 않았으며,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석탄회사를 정리하고 자기 집안의 전 재산을 털어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황해남도의 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였으며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녀에는 대구의 독립운동가 서상돈 등의 주도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됐고, 열심히 활동하여 인정을 받으면서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 역시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다. 안중근, 만주에서(1908년) 독립운동 투신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했다. 의병 활동 안중근(1900년대 후반 추정) 1907년(융희 1년) 황제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강제 퇴위를 당한 뒤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노선을 바꾸어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데 가담하였다.[12] 매국노 척결을 주장하던 그는 의병대를 찾아다녔다. 그 뒤 황해도 의병대의 한사람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신이 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고, 곧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臨時査察[12])에 선출되었다.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1908년 7월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 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혼자의 뜻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3]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1909년(융희 3) 초, 안중근은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쪽 손의 약손가락(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혈서로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처형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이 부분의 본문은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입니다. 저격 직전의 이토 히로부미(왼쪽에서 두 번째)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14]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哈尔滨, 哈爾濱(하얼빈), Harbin)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15]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사격하였다.총알은 할로포인트를 사용하였으며,현재는 금지되어있는 총알이다.[16] 이외에도, 일곱 발의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에게 총격하였다.[14] 총격 후, 안중근은 가슴 안에 있던 태극기를 높이 들어 올리며 에스페란토어로 "코레아 우라!"라고 3번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대한 독립 만세"라는 뜻이었다.[14] 하얼빈역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한 장소 총격 30분 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가끔 사용)를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기록에서는 죽기 직전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 누구지"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체포와 국내외 변호 모금 운동 그리고 사형 판결 니콜라 빌렘 신부와 안명근, 안공근을 면회중인 안중근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군에 체포되었고 1차 조사 이후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졌다.[17] 최재형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제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안중근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관동주 뤼순(료준)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묻는 말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 첫 번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두 번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세 번째,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네 번째,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다섯 번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 번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 번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 번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 번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 번째, 한국이 300만 영국 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 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 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 번째,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죄 열다섯 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이 접해지자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 모금 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미즈노 기타로(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政治)를 관선 변호사로 선임했다. 수감 중에도 그는 동양 평화론의 저술을 하였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마지막 행적 2008년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사망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 관동주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 자신의 사형 집행일로 성금요일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함. 1910년 2월 17일: 안중근은 고등법원장을 면담하여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함. 1910년 3월 9일: 고해성사를 조제프 빌렘 당시 황해도 천주교 신천본당 주임신부에게서 받음. 1910년 3월 10일: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마지막 미사를 봉헌. 1910년 3월 25일: 사형 집행 연기. 세계적으로 성탄절, 정월 초하루, 황제의 탄신일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내의 의병활동이 강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에서 이를 고려, 사형을 연기 요청. 이날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태어난 건원절이었음. 이에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당부를 남김. 당부 내용은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를 청하였고,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 동생 안정근에게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 같은 한국을 위한 일에 종사토록 부탁.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사형 집행. 향년 32세. 참석자: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2008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18] 유언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년 3월 25일자에는 '안씨 결고(安氏 訣告)'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도되었다. 거월십오일(2월 15일)에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씨가 여순감옥내에서 안중근씨를 면회 고별할 시에 안중근씨가 한국동포에게 결고(訣告)하는 사의(辭意)를 안병찬씨에게 설급(說及)하였는데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유지를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하였다.[19]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항소를 포기한 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인 1910년 3월 9~10일경, 어머니가 준비한 하얀 명주천으로 지은 수의를 가져온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20]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21][22][23]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 사형은 뤼순 감옥에서 행해졌다. 구리하라 전옥은 안에게 “금년 2월 24일 뤼순 지방 법원의 언도와 확정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소노키의 통역이 끝나자 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구리하라 전옥은 다시 한 번 안에게 “뭔가 남길 말이 없느냐”라고 물었다. 안은 "아무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일이 동양 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인이 서로 일치 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24][23] 사후 안중근은 자신이 사형 당하면 조국에 운구하여 매장해줄 것을 최후로 당부했다. 그러나 사형당한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의 근처 죄수 공동묘지에 묻혔다. 일제는 안중근을 매장한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 않아 그의 유해가 묻혀 있는곳을 찾을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정확한 위치 역시 알려진 정보가 전혀 없다. 당시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이 형인 안중근의 시신을 돌려달라 요구했지만 일본은 안중근의 시신 인수를 거부하고 숙소에 있던 형제를 감금하고, 강제 귀국 시키는 등 안중근의 시신을 못 가져가게 하기위해 안달이였다. 왜냐하면 안중근의 묘지가 한국 독립 운동의 기폭제가 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1945년 11월에 중화민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1946년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독립운동 3의사의 유해를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였고, 그 옆에 언젠가는 안치될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만들었다. 이것은 안중근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김구는 1949년 안두희의 암살로 사망하였고 그 역시 이곳에 안장되었다. 가묘 앞에는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에 조성된 가묘입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25]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치 또한 찾지 못했다.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의 뤼순(旅順)감옥 북쪽 야산 어딘가에 안 의사의 유해를 묻었다는 일제 당시 간수들의 증언에 따라 정부는 2008년 1차 발굴 작업을 진행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안태근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회장은 “당시 정부가 발굴 작업을 진행했던 곳은 일본인 공공묘지로, 태평양전쟁 직전에 일본인들이 유해를 파서 본국으로 가져갔다”며 “10억원의 예산을 들여 3000여평의 땅을 파는 대대적인 사업을 진행했으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말했다.[26] 안태근 회장은 뤼순감옥구지묘지(旅順監獄舊址墓地)에 유해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발굴을 벌였던 지점과는 반대 방향으로 감옥에서 동쪽으로 500여m 떨어진 곳이다. 가장 오래된 죄인 묘역이다. “1943년 그곳으로 수학여행을 갔던 사람, 아버지와 함께 안 의사의 묘를 참배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모두 그곳을 안 의사 묘지로 지목해요. 묘지가 있는 뤼순에 가면 해당 주민들이 실제 그곳을 묘지로 알고 있기도 하고요. 1차 발굴지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인데, 1차 작업 때 거길 파지 않은 게 못내 아쉽습니다.” 현장에는 이미 아파트가 들어서 유해 발굴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26]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2019년 12월 26일 전라남도 장흥군 장동면 만수길 25-121에 있는 장흥 해동사가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91호로 지정되었다.[27]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기리며 따르자는 취지로 2022년 전반기 신앙의 선조[28]에 신자 안중근을 선정하였다.[29] 사상과 신념 동양평화론 《동양 평화론》의 서문에서 안중근은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 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청국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ㆍ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若政略不改 逼迫日甚則 不得已寧亡於異族 不忍受辱於同種 議論湧出於韓淸兩國人之肺腑 上下一體 自爲白人之前驅 明若觀火之勢矣. 然則...)”라고 서술하였다. 서문의 설명처럼 안중근은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 평화론》에서 하얼빈 의거를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하고 동양평화론이란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대응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방법론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내용을 보면 이토 히로부미가 바라는 ‘동양평화(東洋平和)’는 이웃나라를 침략해 일본에 종속시키는 것이었고 반대로 ‘일본식 동양평화’를 주창하는 이토에게는 안중근은 ‘동양평화의 교란자’였다. 이러한 이토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일으켰고 이후 5개월간의 수감생활과 공판과정에서 안중근은 이토의 사살이 동양평화를 지키려는 정의의 응징이었음을 줄기차게 강조했다. 미완성의 옥중 저서가 된 《동양 평화론》은 ‘하얼빈 의거’를 ‘동양평화의전(東洋平和義戰)’으로 기술하고 있다. 사형장에서의 최후 발언도 “나의 이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결행한 것이므로 임석 제원들도 앞으로 한·일 화합에 힘써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였다.[30] 동양평화론에 대한 평가 하얼빈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시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중국인들은 “안중근 의사가 추구한 동양평화의 정신을 오늘 중국인도 배웠으면 한다”고 말하면서 “안중근 의사의 《동양 평화론》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아도 선구적인 사상”이라며 “한국에서 안중근의 평화사상을 왜 국제화하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 이들은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최후진술하기 위하여 1910년 2월 12일 관동도독부 법정 제5차 공판에서 당당히 밝힌 것도 동양평화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였다고 말한다. 이것이 20세기 넘어 서구 유럽 등에서 구상한 평화보다 70년이 앞서는 사상이었다는 것이다.[출처 필요] 안중근이 지향하는 평화는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부상조하는 길을 찾았고, 이를 통해 서양세력이 동양을 점령하고자 하는 서구 제국주의를 막을 때 동양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고 더 나아가 일본이 침략적 속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대동아공영권 논리의 함정과 모순을 이미 꿰뚫어보았기에 이에 대한 대안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0]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부정적 시각 안중근은 1894년 16세 나이로 동학 농민군 토벌에 나서 공을 세웠다. 그는 옥중에서 쓴 자서전에서 동학군을 "'동학당'(현 일진회의 뿌리이다)이 곳곳에서 봉기하여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구실로 군현을 횡행하면서 관리들을 살해하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었다(이때가 한국이 장차 위태롭게 된 기초로, 일본과 청나라와 러시아가 개전하게 된 원인을 만든 병균이었다)"라고 말한다. 이어 동학농민혁명 봉기가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 청일전쟁의 불씨가 되었다고 본다.[31]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안중근의 부정적 시각은 생애 말년 옥중에서 쓰던 《동양평화론》 전감(前鑑)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첫 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나간 해(갑오년) 일청전쟁을 논하더라도 그때 조선의 좀도둑떼와 같은 동학당의 소요로 인해서 청일 양국이 군사를 움직여 건너와 무단으로 전쟁을 시작하여 서로 충돌하였다."[32] 안중근은 대한제국 멸망 원인에 대해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 민영익을 비롯한 고위 층의 무책임한 처사, 일제의 강도짓 등을 거론한다. 그러면서도 고종과 민비를 비롯한 조선 정부의 실정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동학군을 '좀도둑떼'처럼 여기며 그들에게 상당한 책임을 돌린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안중근은 조선 왕실에 충성을 다하려는 근왕주의적 시각을 벗어나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저서 및 유묵 안중근이 혈서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고 쓴 태극기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저서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 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또한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서전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진다. 이 자서전을 저본으로 하여 1970년에 출판된 《안중근 자서전》이 있다. |
8. 731부대 흔적
| 731부대 731부대(731ななさんいち部ぶ隊たい, Unit 731)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이 생화학 무기 개발을 목적으로 설립한 일본군 부대 겸 연구기관이자 포로수용소로, 수많은 민간인과 전쟁 포로들을 대상으로 비인도적인 인체 실험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31부대의 인체 실험에서는 피험자들을 마루타(丸太)라는 비인간적인 명칭으로 불렸으며, 대부분 극한의 고통을 동반하는 실험에 희생되었다. 국가 권력과 군 조직에 의해 체계적으로 기획되고 실행된 범죄로, 그 잔혹성과 규모에 있어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최악의 반인륜적 범죄로 기록된다. 부대 본부는 하얼빈시 핑팡구에 있었다. 정식 명칭은 "관동군 방역 급수부 본부(関東軍かんとうぐん防疫ぼうえき給水きゅうすい部ぶ本ほん部ぶ)"다. 영어로는 "Unit 731", 표준 중국어로는 7qī3sān1yī部队bùduì로 표기한다. 1936년에 육군 군의 학교 방역부 휘하 이시이 시로 등 군의(軍醫) 5명이 속한 방역 연구실로서 시작되었다. 1936년 당시 관동군 참모장이었던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관동군 방역부의 신설 및 증강을 주장했고 이것을 당시 천황이었던 히로히토가 재가하면서 방역 연구실은 '관동군 방역부'로 정식 발족 되었으며 1940년에 하얼빈시 남부 핑팡(平房)에 새로운 부대 시설을 지은 뒤 통칭 '만주 제659부대 관동군 방역 급수부(満洲第659部隊 関東軍防疫給水部本部)'로 개편되었다.[1] 이 부대는 일본 제국이 패망한 1945년까지 약 5년간 활동했다. '방역 급수부'란 전염병을 예방하고 물을 공급한다는 뜻이다. 본디 만주 지역은 공기와 물이 매우 나빠서 말라리아나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창궐했으며 실제 일본군은 전염병 사상자가 전투 사상자 이상으로 많이 발생했기 때문에 급수 문제가 매우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그래서 쇼와 덴노는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에 급수 부대를 창설할 것을 명령했으며 이에 따라 방역 급수 부대로 창설되었다. 즉, 부대 명칭대로라면 예방의학의 연구 및 식수의 병참을 연구하는 부대였어야 옳았다. 그러나 이시이 시로가 부대장으로 취임하면서 이 명칭은 위장 명칭으로 전락했고 비인간적인 인체실험을 통해서 생물학무기를 개발하는 업무를 맡았다. 단,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731 부대는 이시이 시로 취임 후 부대의 성격이 변질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생물학전을 대비한 세균전 부대로 창설되고 운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부대 초기에는 '동향 부대'라 불리었고 이후 731이라는 비밀 명칭을 유지하다가 패전 직전인 1945년 초에 부대 비밀 코드가 25202로 변경된다. 이 부대의 존재는 일반 군인들에게는 물론이고 일본군 장성들에게까지도 극비로 부쳐졌는데, 731에 관해 알고 있던 장성들은 관동군 사령관 및 극소수의 관련자들뿐이었다. 이 부대 보안의 등급이 어느 정도로 높았냐 하면 부대 상공을 허가없이 비행하는 항공기는 일본군 소속이라도 격추할 수 있도록 상시 허가가 내려진 상태였다. 731부대는 전투기 경폭격기 수송기 여객기 등을 갖춘 자체 항공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731부대 부근에 주둔하던 일본 육군 제8372항공대도 731부대의 임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의 패전 이후 이 부대의 정리정돈, 청산 이전까지 대외적으로 이런 부대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질 않았는데 그야 당연히 부대 자체가 군사 기밀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731부대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731부대는 일본 육군이 추진한 세균전 프로젝트의 본부 격인 조직이고, 핑파오의 731부대 본부 외에도 4개의 731 지대와 소규모 방역 급수 부대(로 위장한 세균전 부대)가 만주 중국 조선 및 동남아시아의 일본군 점령지 도처에 수십 군데가 존재했다. 이 부대들을 통칭 이시이 부대로 부르며 외에도 독가스 전문 연구를 하는 관동군 화학부 516부대 및 동식물 관련 질병 연구를 하던 관동군 군마 방역창 제100부대 등이 존재했다. 이들 특수 임무 부대들은 731부대와 수시로 연구 교류를 실시했다. 마루타 이러한 인체 실험의 대상을 '마루타[2]'라고 불렀다. 희생자 중에서는 전쟁 포로 중국인들이 대부분이었으며 한국인, 미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몽골인, 연합군 포로(미군, 중국군 등)나 소련인 간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끌려가 희생되었다. 미국도 전후 전범들과의 사법거래를 통해 생체 실험과 관련된 자료를 고스란히 얻을 수 있었다. 실제로 이시이 시로같이 731부대에서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른 자들보다 사회적으로 출세한 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은데[3], 이는 미군과의 사법거래에 의한 것이다. 미국이 자료에 눈이 멀어 전범에게 면죄부를 준 탓에 죽어나간 사람들만 억울하게 되었고 이는 미국이 난징 대학살, 만주 사변, 위안부 문제와 달리 731부대에 대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끼는 가장 큰 이유다. 그런데 종전 후 자료 분석 결과 당시 일본 제국의 산업 기술과 공업력이 약해서 실험이 대부분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통제 변인이나 조작 변인 따위는 구분되어 있지도 않아서 실제로 쓸만한 자료는 거의 없었다. 사실 일본보다 몇 달 이전에 항복했던 나치 독일도 홀로코스트에 써먹던 강제수용소들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비슷한 생체 실험들을 진행했고 독일 쪽 자료들 중에는 순환계 및 림프계 관련으로는 어느 정도 혁신적인 자료들이 있길래 일본 731부대 쪽에도 같은 기대를 했던 것인데 이는 1940년대 이전까지 생리학계에서 순환계 및 림프계 관련으로 연구가 영 지지부진했던 것이 더 큰 원인이며 나치 독일 쪽 자료들도 막상 나치 간부들 본인들이 제일 중요하게 여겼던 인종 관련 생체 실험은 완전히 볼 게 없는 개판이었다는 점에서 731부대 쪽과 별반 차이 없었다. |
731부대(일본어: 731部隊 나나산이치부타이[*])는 일본 제국 육군 소속 관동군 예하 비밀 생물전 연구개발 기관으로,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에 있던 부대이다. 공식 명칭은 관동군 검역급수부(일본어: 関東軍防疫給水部 かんとうぐんぼうえききゅうすいぶ[*])이다. 1936년에 설립되어 초기에는 '관동군 방역급수부', '동향부대'로 불리다가 향후에는 '731부대'로 개명하였다. 중일 전쟁(1937~1945년)을 거쳐 1945년까지 생물·화학 무기의 개발 및 치명적인 생체 실험을 행하였다. 공식적으로는 ‘헌병대 정치부 및 전염병 예방 연구소’, '방역과 급수에 대한 임무'로 알려졌으며 실제로 731부대의 총 책임자인 '이시이 시로'는 731부대의 진짜 목적을 위장하기 위해 휴대용 야전 정수기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원래는 태평양 전쟁 전 정치 및 이념 부서로 설립되어 적에 대한 사상, 정치적 선전과 일본군의 사상 무장이 임무였다. 첫 부임자였던 의사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의 이름을 따라, 이시이 부대(石井部隊)라고도 불린다. 731부대는 또한 히로히토의 칙령으로 설립한 유일한 부대이며, 히로히토의 막내 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부대의 장교(고등관)로 복무하였다. 설명 이 부대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 핑팡(平房, 당시 만주국 괴뢰 정부의 영토)에 주둔해 관동군 관할 구역 내의 정수 업무를 하는 것으로 위장되었다. 이 부대는 일본의 정치적 선전, 일본 군대의 사상적 대표로서 업무를 수행했다. 처음에는 반공주의 선동에 집중한다고 주장했으나 초창기부터 이미 부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반인륜적인 행위를 저질렀으며, 생화학·세균전 준비를 위한 연구와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생체 실험을 위한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관동군 주력부대에 물을 공급하는 급수전문 전투지원부대로 홍보했으나 실제로는 각종 생체실험을 자행한 범죄 부대였다.[1] 731부대는 크게 보면, 독일 나치의 SS같은 정치 선동 부서이다. 여기서는 일본인의 인종적 우월성, 사회진화론, 인종주의 이론, 방첩 활동, 정보 활동, 정치적 사보타주, 적 전선 침투 등에 관한 활동을 하였다. 이 부대는 만주 헌병대, 만주 정보기관, 만주 정규 경찰, 만주 거류민 위원회, 지역 만주 민족주의 정당, 일본 비밀 정보기관과 긴밀히 연락했다. 이 부대의 만주에 있는 부문에서는 러시아인, 중국인, 만주인, 몽골인과 기타 특수 부서, 비밀 부서 경력의 외국인을 활용했다. 민간인과 군인 모두 1만 명의 중국인과 조선인, 몽골인, 러시아인이 이 부대의 실험 대상이었다. 일부 미국인과 유럽인 등 연합군 전쟁 포로가 731부대에 잡혀갔다. 게다가 이 부대에서 생물학 무기 프로그램에 의해 연구된 생물학 무기의 사용으로 수만 명의 중국인이 죽었다. 731부대는 일본제국이 세운 생물전 연구기관 중 하나였으며, 516부대(치치하얼 시, 齊齊哈爾), 543부대(하이라얼 시, 海拉尔), 773부대(Songo), 100부대(창춘, 長春), 1644 부대(난징, 南京), 1855부대(베이징, 北京), 8604부대(광저우, 廣州), 200부대(동베이, 東北), 9420부대(싱가포르, 新加坡) 등 중국, 동남아시아 각지에 세워진 기관도 731부대와 유사하거나 731부대의 생체실험 범죄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헌병대가 관리하였다. 인체를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부대의 속성상, 부대 주변 지역을 전부 소개하고 지역주민을 전부 추방시킨 사례나, 부대 인근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생물학 무기를 실험한 사례등 인근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사례까지 알려져 있는 등 하얼빈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부대 인근 지역을 통과 시 열차 커튼을 모두 내려야 하고 부대 인근 지역을 차창밖으로 내다보는 승객은 그 자리에서 체포/심문하는 규정이 존재하였을 정도로 보안에 매우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731부대장 중장 이시이 시로 731부대와 관련된 많은 과학자가 나중에 정치, 학계, 사업, 의학 부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일부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또 다른 일부는 중국공산당에 체포되어 푸순전범관리소에서 심문을 받으며 진술서를 작성했다. 미국에 항복한 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를 제공하는 대가로 사면받았다. 그들이 행한 잔인한 행위 때문에 731부대의 활동은 유엔에 의해 전쟁범죄로 선포되었다. 형성 1932년 이시이 시로는 ‘육군 전염병 예방 연구소’라는 이름의 의무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와 그 부하들은 종마 수용소를 건설했다. 이곳은 그 지역에는 종마 요새로 알려져 있다. 이 실험 수용소는 ‘베이인허’에 있는데, 하얼빈 시에서 남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이시이 시로는 ‘토고 부대’를 조직했는데 화학, 생물학 작전을 하기 위한 비밀 연구 그룹이다. 1935년 탈옥과 폭발이 있었고, 이시이는 종마 요새를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중에 핑팡(하얼빈 시에서 남쪽으로 24킬로미터)으로 가서 훨씬 더 큰 새로운 시설을 만들었다. 이 부대는 나중에 관동군으로 통합되어 ‘전염병 예방부’가 되었고, 같은 시기에 ‘이시이 부대’와 ‘와카마쓰 부대’로 나위어졌다. 창춘에 있었다. 1941년부터 이 부대들은 합쳐서 ‘관동군 방역 급수부’ 또는 731부대로 불린다. 이 부대는 제국청년군(Imperial Young Corps), 대학의 연구소, 헌병대의 지원을 받았다. 어떤 이는 731부대가 헤로인 생산을 위해 만주에서 양귀비를 경작하던 미쓰이 재벌과 연계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당시 일본의 헌병대는 2개로 분류돼 있었다. 내부담당 헌병과 외부담당 헌병이 있었는데 국내에 있는 헌병은 육군대신(국방부장관) 아래 있었다. 외부의 헌병은 침략국에 가면 군령 헌병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군사령관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힘이 있었다. 군인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민간인도 관할했다.… 1938년 8월 26일전에는 특별취급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 후에 있었는데, 특히 구 만주국을 침략했던 헌병들은 특별 이송취급도 관할했다. 관동부 헌병 사령부가 마루타를 취급하고 있는 헌병대로 통지서를 보내 소련에 대한 정보활동을 한 사람, 반만항일(反滿抗日)에 관련된 자, 군과 국가에 대한 반항죄에 해당하는 자는 체포하여 특별취급으로 규정해서 731부대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 당시 일본 제86부대의 헌병이었던 일본인 미오 유타카(1998년 7월 사망)[2] 활동 암호명 ‘마루타’의 특별계획은 실험할 때 인간을 사용하였다. 실험 대상은 주위 인구 집단에서 징용되었고 이들은 완곡어법으로 ‘통나무’(마루타)라 불리었다. 마루타란 용어는 구성원 중 일부의 농담에서 유래했다. 이 시설을 지역 당국에는 제재소라고 했기에 그런 농담이 생겼다. 실험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였고, 심지어 임산부까지 동원되었다. 수많은 실험과 해부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마취없이 이뤄졌고, 이는 부패 등이 실험결과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3] 생체 해부와 의학 실습 수천 명의 수용소의 사람들은 생체 해부의 대상이 되었으며, 많은 해부가 실험의 유효성을 위해 마취없이 이루어졌고 피해부자들은 전부 사망하였다.[4] 수용자들을 다양한 질병에 감염시킨 후 외과수술로 해부하였고, 질병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장기를 제거하였다. 감염이나 해부를 당한 대상은 성인 남녀뿐 아니라 아동이나 영아 또한 포함하였다.[5] 출혈의 연구를 위해 수용자의 팔다리를 절단하였고, 절단된 팔이나 다리를 수용자의 반대편에 다시 봉합하는 실험 또한 진행되었다. 몇몇 수용자의 팔이나 다리는 얼려져 절단되었는데 일부는 다시 녹여져 치료받지 않은 괴저 및 부패의 영향을 연구에 사용되었다. 일부 수용자의 위는 외과적으로 절제되었고 식도와 장이 연결되기도 했다. 이외에 뇌, 폐, 간 등의 절제 수술 또한 행해졌다.[4] 일본 제국의 외과의사였던 유아사 켄(湯浅謙)은 생체실험은 731부대의 밖에서도 널리 행해졌으며[6] 중국 대륙에서의 실험에 약 1000명의 일본군이 관여되어 있을 것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7] 1945년 5~6월 규슈제국대학 의학부 제1외과 이시야마 후쿠지로와 제자들은 격추된 미군 B-29 탑승원 포로 8명을 대상으로 수술 실험을 하였다. 수술 내용은 다음과 같다.[8] 5월 17일 포로 2명의 한쪽 폐를 전부 적출 5월 22일 포로 2명 중 1명에게 위 전 적출 수술. 대동맥을 압박해 지혈하고 심장 정지시킨 후 개흉 심장 마사지, 심장 수술, 나머지 1명은 상복부 절개하고 담낭을 적출, 간장의 편엽을 절제5월 25일 포로 1명에게 뇌수술(3차 신경 차단) 6월 2일 포로 3명 가운데 1명에게 오른쪽 대뢰동맥에서 약 500cc를 채혈한 후 대용 혈액약 300cc 주사. 1명에게 폐동격 수술, 나머지 1명에게 담낭 적출, 대용 혈액 200cc 주사, 간장 절제, 개흉 심장 마사지, 심근 절개 및 봉합, 대동맥 압박 지혈 동상 실험을 했던 다니무라라는 인물은 실험 대상자들에게 야외 실습 실험을 하기도 하였다. 다니무라는 동계 위생 연구반을 조직해 텐트에서의 수술, 지혈, 수혈 등에 대해 가르치는 야외 실습을 했는데, 중국인 8명은 생체 실험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 8명은 실험이나 수술이 끝난 뒤 살해돼 생체 해부용으로 쓰이거나 총살됐다고 한다. 생화학 실험 수용자에게는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예방접종으로 위장된 채 접종되었다.[9] 치료받지 않은 성병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남녀 수용자에게 일부러 매독, 임질을 감염시키고 연구하였다. 수용자들은 간수 등에게 강간당하기도 했다.[10] 전염성 벼룩, 감염된 의류와 물자가 폭탄 안에 포장되어 다양한 목표물에 투하되었다. 이때 이시이 시로 중장이 직접 개발한 도자기 폭탄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도자기 폭탄은 폭발력을 고의로 약하게 만들어 안에 내장된 세균이 죽는 것을 최소화했다. 이에 따라 흑사병, 콜레라, 탄저 등 전염병으로 약 40만 명의 중국인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11] 중국 민간인에게 야토병 관련 실험이 행해지기도 했다.[12] 731부대와 소속 군부대(주로 1644부대나 100부대)는 생화학무기를 개발하여 전투에서 실험하기도 하였다. 특히 페스트균 실험을 많이 했다. 페스트균은 흑사병으로도 잘 알려져있는데, 14세기 지중해 연안, 프랑스, 독일, 영국, 북유럽으로 확산해 4년 만에 유럽 인구 1/3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였다. 이를 살육전에 적용하려 한 731은 '페스트 벼룩'을 개발한다. 균 자체를 그대로 뿌리는 것이 아니라 매개 동물인 벼룩을 페스트균에 감염시켜 완충물에 섞거나 도자기 폭탄에 담아 뿌렸다고 한다. 실제 중국에 살포한 세균의 상당수는 이 페스트균이었다. 미국에서 파견을 나왔던 노버트 H. 펠은 1947년 6월 30일 본국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13] 벼룩 번식법과 쥐를 통해 벼룩을 감염시키는 방법을 방대하게 연구했다. 페스트 벼룩은 최선의 조건 하에서는 약 30일 생존하는데, 그동안 감염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판명됐다. 1㎡당 벼룩 20마리가 있는 방에서 실험 대상자를 자유롭게 풀어두는 실험을 했는데, 10명 중 6명이 감염되고 4명이 사망했다. — 페스트 벼룩 실험에 대해 사람을 묶어 헬멧을 씌우고 갑옷을 입혔다. 지상에서 고정해 폭발하는 것, 비행기에서 투하된 시한 기폭 장치가 설치된 것 등 각종 폭탄으로 실험했다. — 탄저균 폭탄 실험에 대해 10명 중 6명의 혈액에서 균이 발견됐고 이 중 4명은 호흡기로부터 감염됐다고 추정했다. 4명 모두 사망했다. 이 4명과 일제히 폭발한 9개 폭탄과의 거리는 불과 26m였다. — 다른 폭탄을 사용한 야외 실험에 대해 연구소에서 키운 벼룩을 저공비행으로 중국 도시에 살포했는데, 1940년에는 닝보시에서, 1941년에는 창더 시와 허난성에서 살포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발생한 페스트 전염으로 수천 명이 살해당했다.[14] 기타 여러 실험 일부 수용자는 질식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알아보기 위하여 목을 매달았다. 일부 수용자는 색전이 생기는 시간을 결정하기 위하여 동맥(또는 심장)에 공기가 주입되었다. 일부 수용자는 신장에 말의 소변이 주입되었다. 일부 수용자는 사망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결정하기 위하여 물과 음식을 전혀 주지 않았다. 일부 수용자는 사망할 때까지 저기압의 방에 놓였다. 일부 수용자는 극저온에 놓이어 동상이 걸리게 하였다. 그런 조건에서 얼마나 생존하는지, 인체 살의 부패와 괴저가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이는 주로 여성 수용자에게 행해졌다. 일부 실험은 온도와 화상, 인간 생존의 관계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 일부 수용자는 원심분리기에 넣어져 사망할 때까지 돌려졌다. 인체 수분 함량 비율을 알기 위함이었다. 알아낸 결과 인간의 신체는 약 70%의 수분으로 구성 되있다 동물의 혈액이 일부 수용자에게 주입되어 그 효과가 연구되었다. 일부 수용자를 가스실에 넣어 다양한 종류의 화학 무기를 시험했다. 바닷물이 몇몇 수용자에게 주사되었다. 바닷물이 생리식염수를 대체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무기시험 731부대는 인간 목표물을 다양한 거리에 위치시켜 수류탄의 살상력을 시험하였다. 인간들은 화염방사기의 실험에도 사용되었으며, 생화학무기나 기타 폭탄들도 시험되었다.[15][16] 실험 외의 살인 731부대의 판임관(위관급 장교)과 고등관(영관급 장교 및 기사(의사)들은 실험이 이미 끝났지만 살아있는, 그러나 실험으로 인해 쇠약해지거나 병들어 죽음을 앞둔 수용자들을 원판에 묶은 뒤 원판을 돌리며 그 원판에 단검을 던지는 게임을 했다. 이때 판임관들 사이에서 도박이 행해졌는데 명중되는 부위를 걸고 자신이 선택한 수용자의 신체부위에 단검이 명중되었을 경우 그 간부가 도박에 걸어놓은 돈을 전부 획득했다. 731부대의 군인들은 때때로 아직 실험하지 않은 여성 수용자들을 강간치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731부대에서는 병사들의 군기를 확립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수용자 중에 가장 병약하거나 가장 저항이 심한 수용자를 실험재료로 사용하기 전에 육모 방망이로 때려서 숨지게 하도록 강요했다. 이는 수용자를 인간으로 인식한 일본군 병사가 수용자를 탈출시켜 주는 것과 석방을 요구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
여름휴가의 하얼빈!! 그냥 쉬고, 설렁설렁 다니고 ~~~
이것저것 자료를 보니,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서울에도 있다. 그러나 가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하얼빈은 역사의 현장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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