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인권변호사의 대부'로 추앙받아온 '범하' 이돈명 선생의 별칭이자 애칭은 뜻밖에도 '촌놈'이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무지랭이 농군'으로 살아갈 뻔 했던 그의 이력 때문이 아니다. 독재와 억압의 시대 칼날 위를 걸어야 했던 모든 양심수들에게 온 몸으로 방패가 되어 준 그 우직한 품성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서다.
초등학교만 나와 오로지 독학으로 서른이 넘어 고시에 합격한 그는 탄탄한
입신양명의 길을 버리고 70년대 스스로 반유신의 가시밭길로 뛰어들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민청학련) 사건이 조작됐다고 판단한 그는 이름만 알뿐 친분은 없었던 후배 황인철·홍성우 변호사를 찾아가 구속자 변론 활동에 합류했다. 이후 20여년의 민주화 투쟁의 길에서 그의 이름은 언제나 맨 앞에 서 있었다.
환갑이 훨씬 넘은 86년 10월 그 자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쓰고 8개월이나 수감됐던 사건은 그의 우직함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일화다. 당시 수배중이던 민통련 사무차장 이부영씨를 숨겨주고 도피자금을 줬다는 그의 혐의는 사실이 전혀 아니었으나, 실제로 이씨를 도와준 후배 고영구 변호사를 보호하고자 기꺼이 옥고를 치룬 것이었다. "나는 불의에 쫓기는 한 마리 양을 보호했을 뿐, 결코 범인을 은닉했다는 가책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의 최후진술은 후배 법조인들에게 일종의 격언이 되기로 했다.
그때 옥중에서 얻은 심장병을 비롯해 암 투병과 다리 수술 등으로 내내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구십 평생 '인권과 민주의 현장'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지켰다. 마지막 사회 활동이 된 지난해 8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재개관 기념예술제에서도 그는 부축을 받으며 단상에 올라 특유의 순박한 말투와 표정으로 축사를 해냈다.
두해 전 겨울, 동갑이자 평생의 지기였던
김수환 추기경의 서거 때 인터뷰에서 했던 그의 애도의 말씀이 마치 유언처럼 남았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는 것이니 피할 도리가 없지만… 세상이 좋은 분을 또 잃었어. 남은 사람들이 잘해야제."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인권변호사들의 '맏형' 이돈명 변호사 별세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 인사들의 동반자이자 인권변호사들의 맏형이었던 이돈명(사진·법무법인 덕수 대표변호사) 변호사가 11일 별세했다. 향년 89.
이 변호사는 최근까지도 법무법인 사무실에 출근하는 등 외부 활동을 했으나, 이날 저녁 7시20분께 서울 강남구 대치동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환으로 눈을 감았다.
이 변호사는 1922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48년 조선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52년 사법고시 3회에 합격한 뒤 판사를 거쳐 1963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는 1974년
유신독재의 대표적인 조작사건인 '민청학련' 사건을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에 들어선 뒤 줄곧 민주화 인사의 법적 보루이자 동반자로 살아왔다. 이후
인혁당 사건, 와이에이치(YH) 사건,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그리고 10·26 사건의 김재규 변호 등을 거치면서 자신도 투옥을 당하는 등 권력의 억압에 고난을 겪었다.
1986년 가톨릭정의평화위원회 회장,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맡아 활동 영역을 법조계 바깥으로 넓혔고, 1987년 < 한겨레 >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해 창간 뒤 등기이사를 맡았다. 또 1988년부터 재단 전횡으로 문제가 된 조선대의 총장직을 맡아 학내 개혁을 이끌기도 했다.
가족으로는 아들인 영일(전 한국은행국장·전 한국주택저당채권유동화 사장) 동헌(전 건축구조기술사회 회장) 사헌(미국 거주)씨와 사위인 양원영(전 휘문고 교장) 서해준(전 다우케미칼 상무)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02)3410-3151.
김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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