톤레삽 수상가옥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 우리의 뚝뚝이 기사 - 소쿰이 자기 집이 바로 이 근처란다.
잉 ~~~ 그럼 매일 30분씩 달려 출근하는 검?? 그렇단다!! 우 ~~~
그러면서 자기 집에 들러보고 싶냐 묻는다!! 그래 그래!!! 니네는 또 어떻게 사는데???
아마도 색다른 경험이 되겠지!! ~~~~ 가보자!!!!
그래서 찾아간 소쿰의 집!!
[ 이넘이 소쿰의 큰아들이다. - 5살?? ]
캄보디아는 모계사회(?)의 형태를 띠고 있단다. 자신도 부인의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단다.
식구들을 소개하는데 .... 모두 아내의 식구들이다.
우선 부인!! - 임신 중이다. 셋째가 다음 달 태어난단다.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 ㅋㅋ 아들이 둘이니까!!
그리고 장모님과 같이 산다. 자기 집에서는 장모님과 같이 살고, 이 큰 집에는 장모님의 여동생, 그니까 이모가 되겠지!!
그 이모님이 그의 아들(출가 전)과 딸, 많은 조카들과 살고 있단다.
정말 대가족이다.
순진한 조카들 ~~~ 서로 인사하고!!! 살갑다.
주택의 아랫 부분이 공동의 공간이나 보다!! 아이들도 이 곳에서 놀고, 아마도 이 곳에서 모두 같이 식사도 하나보다!!
소쿰이 조카를 시켜, 맥주를 사왔다!!
아 ~~ 이거 미안하기도 하고 ~~~
시원한 맥주와 꼬치(? ; 정확하게 그 음식의 이름을 모름!! ㅠㅠ )를 안주 삼아!!!
소쿰이 자신의 이야기와 캄보디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참 너무나 큰 아픔의 역사!! 수많은 전쟁, 전쟁 이후의 절대적 빈곤!!
마음이 아프다!!!
소쿰도 크메르와의 전쟁을 피해, 잠시 스님이 되기도 했단다. 거기서 영어를 배웠다고 .....
사실 캄보디아의 역사에 대해 잘 몰랐다. 킬링필드 정도만????
어느 덧 날은 저물고, 할 이야기는 많고 ~~~
다행스러운 것은, 이 곳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참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 사회단체들이 이 곳에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런 흔적을 도시에서도 가끔 찾아볼 수 있기도 하고 ....
소쿰의 조카들도 학교를 다니는데, 한국 사회단체가 지원하는 곳이란다.
우리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ㅎㅎ
그래 또 만날 수 있겠지!! 아이들을 모아 놓고, 당부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고, 행복해라!!
악수하고, 포옹하고 ~~~
특별히 소쿰의 아내에게 깊은 포옹을 해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색다른 감동의 시간이었다. 행복한 시간, 경험!!!
소쿰에게 팝 스트리트에 내려 달라했다. 저녁도 먹어야 하니까!!!!
그리고 가지고 있던 30USD를 주었다. 오늘의 행복함에 비하면 형편없는 금액이지만 ..... 성의!!??
소쿰은 너무너무 감사한다. 그래 ~~~ 내가 더 감사!!!
사실 고민을 좀 했다. 얼마쯤이면 지나치지 않고, 또 부족하지 않을까??
아내의 무사한 출산과 선물을 당부하며 ..... 너무 과하지 않게 !!!
팝 스트리트에는 수많은 음식점들이 있다. 종류도 다양!! 오늘은 어디를 선택해 볼까???
크메르의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크메르가 눈에 들어온다. 간판에 머라 써 있었지???
크메르의 주방???
우선 맥주도 각각으로 시켜보고, 라오 비어는 많이 마셨으니까!! 하이네캔, 산미구엘, 타이거!!
커리와 돼지고기, 그리고 셀러드, 스프링롤 등을 맛있고, 배불리 먹었는데 ....
참 착한 가격이다. 총 18USD!!!
우리는 소쿰의 하루벌이를 한끼 식사로 먹는다!! ㅠㅠㅠ
그래 좋아지겠지!! 우리도 60년대는 그렇게 살았단다. 너희들에게도 신의 가호가 있기를 !!!!
기분 좋은 경험과 한편 피곤함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는 캄보디아 역사 공부!! ㅋㅋㅋ
[ 인터넷 어디에선가 퍼온 글 ]
캄보디아의 비극적 현대사는 크게 5시기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1시기(1953~69년말)는 1953년 독립한 뒤부터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2012년 사망)국왕이 비동맹 중립 정책을 펴면서 미국과 갈등을 빚은 시기다.
2시기(1970~75년)는 프놈펜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시아누크 국왕이 물러나고 론 놀(Lon Nol)장군의 친미정권이 들어서면서 크메르루즈 군과 내전을 벌인 시기다.
3시기(1975~78년)는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이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군에 함락 된 후부터 1979년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폴 포트 정권이 몰락하기까지의 기간이다.
4시기(1979~89년)는 10만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폴 포트 정권을 무너뜨린 뒤 헹 삼린, 훈 센의 친 베트남 정부를 세운 뒤 89년 철군한 시기이다. 이시기는 정부군(베트남군)과 폴 포트의 크메르루즈 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던 시기이다.
5시기(1989~현재)는 크게 훈 센이 집권한 시기이다. 베트남군이 철군하고 파리평화협정 쳬결 뒤 U. N 평화유지군 1만 6000명이 포함된 유엔 캄보디아 임시행정청(UNTAC)의 선거 감독 아래 프놈펜에 연립정부가 들어선 후 잇단 정치 불안 속에 1997년 훈 센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현재에 이르는 시기다.
1시기 - 왕정
캄보디아 혹은 캄푸치아라고 불리던 나라는 한때 동남아 영토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던 강성대국이었다. 캄보디아의 황금기는 단연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이어졌던 크메르 제국(Khmer Empire)이였으나 제국의 멸망 이후 시암(현재의 태국)과 베트남 등 이웃나라의 침략에 의해 국운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들 국가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1863년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으며 이러한 지위는 1953년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가 이끄는 캄보디아 정부가 독립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시아누크 국왕은 비동맹 중립외교를 포방했으며 농업중심의 국가였다.
1969년 여름 태국 파타야와 괌에서 이륙한 미 공군 B-29 폭격기 수십 대는 베트남 국경과 인접한 캄보디아의 쁘레이 벵과 스와이 링 지역을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주요 살상무기는 네이탐판, 고엽제(에이전트 오렌지) 등 최악의 살상무기들. 인명 살상용 폭탄부터 치명적인 화학무기까지 거칠 것 없이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 쏟아 부었다. 사람이 죽든, 가축이 죽든 캄보디아는 초토화되었다.
이유는 당시 베트콩이 수송로를 봉쇄당하자 캄보디아 지역을 통과하는 호치민 루트로 전쟁 물자를 날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아누크 국왕은 미국이 자국의 영토를 넘어 베트남에 폭격하는 것과 자국에 폭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시아누크 국왕을 두고 베트남전을 치루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1970년 시아누크 국왕이 회외순방을 하고 있을 때 국방장관인 론놀이 쿠데타를 이르켜 정권을 잡고 친미 친서방을 표방하게 된다.
2시기 - 론놀의 친미정부
론놀은 정권을 잡은뒤 1973년까지 계속된 미군의 폭격을 묵인했다. 당시 이 계획을 꾸민 사람은 닉슨대통령의 안보 고문이었던 헨리 키신저. 최종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닉슨 대통령 그러나 이들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미 국회의 승인마저 받지 않았다. 이 작전에 동원된 폭탄은 54만 여톤으로 2차 세계 대전 때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폭탄의 2-3배 정도이며 죽어간 캄보디아인들의 수가 무려 6-80여만 명이다. 이 인원도 조사할 때마다 달라서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고 추정치 일뿐이다. 마을전체가 몰살당해 몇 명이 죽었는지 증언할 사람이 없기도 했고 인구조사가 이루어 진적이 없기 때문에 전과 후를 비교할 수도 없었다. 킬링필드는 벌써 시작되었다. 학자들은 미국에 의해 저질러진 폭격으로 인한 학살을 1차 킬링필드라 부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참혹한 학살의 주범인 키신저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1970~75년 기간 동안 캄보디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18억 5000만 달러어치의 군사경제 원조를 퍼부었다. 그러나 론 놀 정권의 부패한 장군들은 미국의 원조를 캄보디아의 발전에 쓰지 않았다. 부패와 크메르 루즈와 내전으로 경제는 더욱 나빠졌다. 1973년 한 해의 인플레 275%에 이르렀을 정도다. 그럴수록 론 놀 정권은 美 원조에 매달렸다. 당시 캄보디아는 국고 수입의 95%를 미국의 원조로 충당했다. 론 놀 정권은 공산주의자에게 야수적인 탄압을 가했는데 공산당원의 머리를 잘라오면 포상을 해 주는 식이였다. 일반주민들을 죽이는 경우가 빈발하여 머리와 총을 함께 가져오는 것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혁명의 이상으로 무장한 폴 포트는 1953년 조국으로 돌아와 무장 저항조직 활동을 하며, 1960년대부터 캄푸치아 노동당을 이끌었다. 인도차이나 공산당 캄보디아 분과 출신들과 프랑스 유학파 출신들을 중심으로 크메르 루즈를 만들었다. 붉은 크메르(앙코르와트를 만든 왕조의 이름)라는 뜻이다. 크메르 루즈의 지도자 폴 포트(본명 ‘살로트 안사르’1925∼1998), 키우 삼판, 이엥 사리등은 모두 식민지 시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던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유학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 이들은 모택동 주의에 기울어 시아누크 국왕체제에 불만을 품고 1960년대 후반부터 캄보디아-베트남 접경지대에서 세력을 키웠다. 그러다 친미 성향의 론 놀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이에 대해 무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시아누크국왕은 재임시절 크메르루즈에 대한 탄압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시하누크국왕은 공동의 적인 론 놀정권에 대항하여 싸울 필요가 있었다. 국왕과 크메르루즈는 중국의 중재하에 협상을 진행하였고 캄푸치아민족통일전선(National United Front of Kampuchea)을 구성하고 론 놀 정권에 공동으로 투쟁하게 되었다. 국왕은 중국에서 라디오를 통해 크메르 루즈와 함께 론 놀 정권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지도했고 크메르 루즈는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하였다. 또한 미국의 폭격은 더욱더 크메르 루즈를 지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 훈센은 시아누크국왕의 연설을 듣고 크메르 루즈에 가담했다고 밝힌바 있다. 시아누크국왕은 “나는 크메르루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그들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애국자들이다. 나는 불교신자지만 부패하고 친미 허수아비인 론 놀 치하의 불교국 캄보디아 보다는 정직하고 애국적인 붉은 캄보디아를 택하겠다.”(1973년 7월 18일자 워싱턴포스트) 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다.
3시기 - 폴 포드의 크메르루즈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즈는 프놈펜을 함락했고 론 놀은 미국으로 달아났다. 캄푸치아 노동당은 강령에 노동자 계급의 정당이라고 했지만, 후진 농업국가였기에 영세농민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지도세력 자체가 노동자의 삶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농민이거나 농민 출신 학생이었다. 마르크스에게 농민은 봉건적인 존재였다. 농민이 진보된 프롤레타리아의 특성을 가지려면 경제적 역할이 바뀌어야 했다. 폴 포트는 이러한 난제를 마오쩌둥이 마르크스주의를 중국 유교식으로 변형한 것과 비슷하게 불교식으로 변형해 해결했다.
불교국가였던 캄보디아에서 폴도 어려서 사미승 수도생활을 했었고, 평당원들도 소승불교에 익숙해서 불교식 개념은 받아들이기에 쉬웠다. 또한, 노동당의 활동자체가 승려의 수도 생활처럼 기율과 금욕을 중시했다. 크메르 루즈 정책의 최우선 목표는 캄보디아 사회 전체를 외부세계에 오염되지 않은 토착농민들처럼 개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974년 당 중앙위원회가 프놈펜을 비롯한 캄보디아 내 모든 도시는 해방시키는 즉시 소개하고, 도시민은 시골로 보내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한 것이다. 프놈펜시민들에게 48시간이내에 도시를 벗어나도록 결정했다. 250만 명이 넘는 프놈펜 시민을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의료 시설이나 교통수단, 식량지원에 대한 계획도 없이 단시간에 혼잡한 도시 밖으로 소개하는 일은 엄청난 고통을 초래하는 일이었다. 프놈펜의 병원도 소개됐고, 2만 명의 환자도 마찬가지로 병든 몸을 이끌고 이주 행렬에 나서야 했다. 더구나 4월은 캄보디아에서 가장 무더운 달이다. 도시 소개는 그 자체로 참극이었다. 수만 명이 이동 중에 죽었고, 도시 이주민들은 낯선 농촌에서 오염된 주민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야만 했다. 폴 포트는 새로운 캄보디아를 건설할 기반으로 농업을 중요시했고, 외부의 원조에 의지하기보다는 국내자원을 이용하는 자급자족적인 경제정책을 계획했다. 수년간의 내전으로 산업기반시설이 남아 있을리 없었기 때문에 농업을 중심으로 경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정책이 아니라 실천에 있었다. 도시의 주민들을 농촌으로 이주시키면서 주거나 의료 식량문제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 불합리하고 공상적이며 그저 잔혹하고 몰인정했다. 캄보디아 공산지도자들은 모범적인 혁명을 꿈꾸면서도 단 한 번도 혁명이 가능한 사회적 조건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치 전쟁을 수행한 것과 똑같이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자 했었던 것이다. 뚜얼슬렝 박물관에 가면 시계와 등불을 모아놓은 사진이 있는데 농사하는데 필요가 없고 공부하는데 필요하다며 모두 폐기처분했다고 한다. 극단적 이상이 낳은 극단적인 사회가 바로 크메르 루즈였다.
2차 - 킬링필드의 시작
이전 론 놀 정권에 부역한 사람, 도시소개에 반대한 사람, 그리고 베트남 공산당과 연관된 사람들이 주로 숙청을 당했다. 이전 정권출신과 도시소개에 반대한 사람은 이해가 되는데 같은 공산당 사람을 숙청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유가 있었다.
인도차이나 공산당 출신들과는 노선에서 계속대립하게 된 폴포트측은 헤게모니를 잡은 후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하게 된다.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되게 되는데 폴포트는 농경사회중심의 마오주의를 채택해 중국과 가까웠고 인도차이나공산당이 바뀐 베트남 공산당은 스탈린주의를 채택해 소련과 가까웠다. 중국과 베트남은 국경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또 세계적인 곡창지역인 메콩강 하구 삼각주지역은 원래 캄보디아 땅이였는데 베트남의 영토로 되어 있었다. 폴포트는 이곳을 탈환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며 베트남과 대립하게 되었다. 그 결과 베트남 공산당과 연계된 사람, 인도 차이나 공산당 출신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있었다. 뚜얼 슬렝(Tuol Sleng)에 잡혀온 사람들은 공범 5명을 말할 때까지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공범을 말하고 나면 10키로 떨어진 곳에서 처형 당했던 것이다.
챈들러는 크메르 루주가 처형한 수를 10만 명으로, 비커레이는 처형한 수를 15만~30만 명 정도에 기아·질병·중노동으로 죽은 이들을 약 75만 명으로, 그리고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는 사형과 질병, 기아로 죽은 이들을 합해 약 100만 명으로 보고 있다. 이런 조사연구를 기준삼아 전문가들은 크메르 루주 집권기에 죽은 이를 80만~100만 명이라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 학살 제1기에 해당하는 1969~73년에 미군의 폭격으로 죽은 양민 수를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는 약 60만 명으로, 다른 연구자들은 40만~80만 명 정도로 각각 추산했다. 이렇게 해서 제1기 미군 학살과 제2기 크메르 루주 학살을 모두 합해 10년 동안 약 150만~160만 명에 이르는 양민들이 살해당했는데, 이것이 킬링필드의 전모다.
4시기 - 베트남의 침략시기
크메르루즈 지도부는 메콩강 하류 베트남국경지역에서 베트남군과 고전을 면치 못하는 캄보디아 군지도부를 숙청하기로 하고 프놈펜으로 소환한다. 이것을 미리 안 군지도부들은 군을 이끌로 베트남으로 망명을 해버리는데 이들이 바로 현재 집권세력인 헹 삼린(Heng Samrin), 찌아 심(Chea Sim), 훈 센(Hun Sen)등이다. 이들은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공격하는 베트남군의 선봉에 선 것은 자명한 일이다. 1979년 1월 7일 크메르 루즈 체제는 막을 내렸고 크메르 루즈 지도자들과 추종세력들은 캄보디아와 태국의 접경지대로 피신했다. 이 승리는 캄보디아 국민들을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돌려준 사건이었다. 당시 거의 모든 캄보디아인들은 절대적 빈곤상태였으며 국가 기반시설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던 터라,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Kampuchea)이라는 새로운 국명으로 출발한 캄보디아는 폐허에서 모든 것을 복구해야 하는 동시에 크메르 루즈 세력이 다시 복귀하지 못하도록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10여년간 베트남군 10만여명이 캄보디아에 주둔하게 된다.
태국과 국경산악지역인 파일린으로 피신한 크메르 루즈는 20여년이나 저항을 계속한다. 이지역이 보석이 많이 나는 지역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서방세계의 대규모 군사, 경제적 지원이었다.
베트남의 서진정책은 도미노이론을 떠올리기 충분했다. 당장 다급해진 쪽은 태국이었다. 태국은 베트남의 서진을 막기 위해서는 크메르루즈를 방패삼아 베트남과 싸워야 한다며 크메르루즈에 대한 서방의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은 크메르루즈가 공산주의를 버리면 지원하겠다고 했고 1980년 크메르루즈는 공식적으로 공산주의를 지도이념에서 버렸다. 이후 서방세계의 물량공세는 대단했다. 군수품과 식량 등을 대규모를 지원해서 베트남군과 싸우게 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세력이 조성한 냉전 속에서 정치행위는 진실보다 우선시 되었다. 1980년대 UN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규탄하는 표결을 진행했으며, 결국 크메르 루즈 세력은 UN이 인정하는 캄보디아 정부로 등극하기도 했다. 자연스레 크메르 루즈를 몰아내고 들어선 신 정부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시절을 보내야 했고 1989년, 신 정부는 공산주의를 버리고 국명을 캄보디아국(State of Cambodia)으로 변경함으로써 UN의 인정을 받는 국가가 되었고, 베트남군은 캄보디아에서 철수했다. 크메르루즈를 반공교육의 선전장으로 만든 서방이 크메르루즈를 지원하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겠다.
1979년 8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정부는 크메르 루즈 지도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인민혁명재판을 소집했다. 5일간 열린 이 재판에서 학살의 주범이었던 폴 포트와 이엥 사리(Ieng Sary)는 피신 중인 관계로 법정에 세우진 못했지만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당시 재판은 절차상의 문제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외교적 고립상태로 인해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범죄자들에 대한 선고내용은 실현되지 못했다.
5시기 - 현재 진행시기
1991년 10월 23일 파리협정에 의해 1993년 5월 UN 캄보디아 과도 권위체(United National Transitional Authority in Cambodia/UNTAC)가 주관하는 총선이 캄보디아에서 진행되었다. 그해 6월 제헌의회가 소집되어 9월 23일에 신헌법이 공포되면서 입헌군주제에 기초한 캄보디아 왕국(Kingdom of Cambodia)이 재건되고, 시아누크가 왕으로 복위했다. 그 결과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 시하누크 국왕의 아들)와 캄보디아국의 총리였던 훈 센을 공동 총리로 한 연립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크메르 루즈는 총선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1998년 정부의 화해전략에 의해 공식적으로 와해될 때까지 게릴라 활동을 지속하였다. 1997년 라나리드 공동총리가 외국순방중 훈센의 쿠데타로 단독 정권을 잡아 오늘까지 장기 집권을 하고 있다.
1993년 총선 이후 공동총리로 선출된 노로돔 라나리드와 훈 센은 1997년에 이르러 크메르 루즈 지도자들을 심판할 수 있는 재판을 열 수 있도록 UN에 공식적으로 도움을 청하기에 이른다. UN은 국제 재판을 제안했지만 훈 센 총리는 국가 차원의 화해 분위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외국의 법적인 조력에 의한 국내 재판을 원했다. 2003년에 이르러 UN과 캄보디아 정부는 양측의 입장을 적절히 배합한 중간 형태의 재판을 열기로 합의하고 2005년 마침내 캄보디아 특별재판소가 설립되었다. 특별재판은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의 고위급 지도자들 및 당시 행해진 범죄행위와 중대한 (국제법) 위반이 인정되는 책임자들을 기소하고자 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폴 포트(1998년 사망)와 따 목(Ta Mok, 2006년 사망), 그리고 중간 및 하급 관리자들은 기소하지 못했다. 특별재판은 현재까지 두 개의 사건을 다뤄왔다. 사건번호 001은 뚜얼 슬렝으로 알려진 프놈펜의 S-21 보안감옥의 책임자였던 카잉 궥 이아우(Kaing Guek Eav)에게 종신형을 내리면서 완료되었다. 현재 진행 중인 사건번호 002는 누언 찌아(Nuon Chea, 민주 캄푸치아 서열 2위), 이엥 사리(민주 캄푸치아 외무부 장관), 키우 삼판(Khieu Samphan, 민주 캄푸치아 수반), 그리고 이엥 티리트 (Ieng Thirith 민주 캄푸치아 사회부 장관)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 중 세 명은 학살, 반인권 범죄, 전쟁 범죄의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캄보디아 정부는 특별재판이 그 밖의 다른 사건들에 대해 다루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
결론
크메르 루즈 지도자들이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저지른 끔찍한 학살에 대해 국제적으로 기소되기까지 30여 년이 걸렸다. 오랜 세월이 걸린 이유는 강대국과 당사자들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미국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의 폭격을 빼려고 무수한 노력을 했고 결국 이문제는 역사적으로 다뤄지지 못하고 있다. 또한 크메르 루즈를 초기부터 지원한 중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미국 또한 크메르 루즈를 지원했다. UN은 1989년까지 캄보디아의 합법적인 정부로 크메르 루즈를 인정했다. 현 집권세력도 모두 크메르 루즈출신이다. 이렇다 보니 수많은 시간이 걸린 것이다. 실체규명은 거세되고 사라진 크메르 루즈만 남게 된 것이다.
선전용도로 과장된 크메르루즈의 참극
현 집권세력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크메르 루즈를 붕괴 시킨 것에서 찾고 있다. 캄보디아인들은 소승불교의 영향으로 유골을 박물관에 방치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데 불교식으로 화장하자는 불교계의 건의도 외면하면서 크메르 루즈의 잔혹성을 알리는데 열중하고 있다. 훈센정부는 자신들의 부정과 부패를 크메르 루즈의 잔혹성으로 희석시키려 하고 있다. 미군의 폭격으로 죽은 사람도, 론 놀 정권하에서의 학살도, 베트남식민지시절의 착취도, 모두 크메르 루즈의 소행으로 몰아가고 있다. 사람의 기억이란 묘해서 계속해서 주입하면 모두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캄보디아는 총체적으로 크메르 루즈가 나쁜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훈센정부는 과연 그런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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