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28공원과 중정기념당

중국, 일본, 대만

by 초보어부 2012. 6. 5. 14:12

본문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228공원!!

위안산역에서 MRT 타이따이위엔역으로 .... 출구로 나오면 바로 공원이다!!

 

어쩌면 우리의 근대역사와 아주 유사한 타이완의 역사!!

아직도 그 슬픔은 정리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아픔이다!! 우리의 1980년 5월의 광주도!!

 

 

위키백과에서 사건의 개요를 퍼온다!!

 

사건의 원인

19451025일 타이완 주둔 일본군은 국민당 군에 정식으로 항복하였고, 이날부터 타이완은 국민당정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청일전쟁 이후 50년간 일제의 지배와 수탈을 받던 타이완 주민들은 국민당정부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그들의 통치는 본토에서와 다르지 않았고, 일제(日帝)의 식민통치만큼 가혹했다.

 

신임장관(천이)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그 섬에 도착하였는데 수행원들은 교묘하게 대만을 착취하기에 바빴다……. 군대는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비밀경찰은 노골적으로 민중을 협박하며 본토에서 온 중앙정부의 관리가 착취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

미국무부, 중국백서

 

외성인(外省人)에 비해 본성인(本省人)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정부의 요직은 장제스를 위시한 외성인들이 차지했고, 국민당정부가 본성인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정책을 펴자 주민들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계엄령을 통해 타이완을 억압하기만 할 뿐 타이완의 민심에는 관심이 없었고, 타이완을 대륙에서의 전쟁을 위한 일종의 군사기지처럼 취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타이완의 민심은 날로 흉흉해졌고 국민당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팽배하였다.[1]

 

발단

1947227일 밤, 타이베이 시 위엔환(圓環) 빌딩 안의 복도에서 정부의 전매 독점품인 담배를 노점에서 팔던 린쟝마이(林江邁)라는 여인이 허가받지 않고 담배노점을 했다는 이유로 담배주류공사의 직원과 경찰에 의해 단속되었다. 탈세를 빌미로 담배주류공사의 단속반원이 담배를 팔던 여인을 상대로 총신으로 머리를 때리는 등 심한 구타를 가하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경찰이 과격한 단속행태에 항의하면서 충돌이 빚어졌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항의하는 군중에게 발포하였고, 경찰이 쏜 총에 학생 한 명(陳文溪)이 사망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사건의 경과

1947228, 타이완 시내에서 시위하는 시위대1947228, 사망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들이 발포공무원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며 타이완에 들어와 있던 국민당 경찰과 장제스 휘하 군부대 본부를 에워싼 채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타이완 경비총사령 천이(陳儀)는 시민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시위를 빌미로 타이베이시에 임시 계엄을 선포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급기야 경찰서에 난입, 경찰들을 구타해 경찰관이 사망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천이(陳儀)의 집무처로 밀려든 시위대를 향해 군()이 기관총소사를 퍼부어 많은 사상자를 냈다. 시위는 타이베이 시내 도처에서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의 양상으로 확대되었고, 분노한 시위대는 방송국을 점거하고 타이완 전 주민이 궐기할 것을 외쳤다. 이것이 이른바 '2·28사건'이다. 228일 당일에는 타이베이 시 전역에서 파업과 철시 및 데모대의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었고, 31일 이후 시위는 타이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년 반 동안 쌓인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여 봉기는 삽시간에 대만 전역에 퍼지고 32, 타이완의 지식인들은 각지에 '2·28 처리위원회'를 구성, 담배 전매 폐지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타이베이시 참의회는 사태 해결을 위해 당일 오후 2시에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의회에서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담배 단속 살인사건 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타이완 성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 천이(陳儀)는 방송을 통해 다음 4개 사항을 공표하였다.

 

1.계엄은 즉시 해제한다.

2.체포된 시민은 석방한다.

3.군인과 경찰의 발포를 금한다.

4.참의원에서 대표를 추천하여 정부 관리와 같이 공동으로 처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번 폭동 문제를 처리토록 한다.

무차별 발포를 한 군·경을 대신하여 학생과 청년들로 조직된 치안 봉사대가 치안을 유지하고 처리위원회의 공정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34일 이후 사태는 서서히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처리위원회에 대한 타이완 주민들의 지지가 더해지면서 그 권위가 높아지자, 처리위원회는 2·28 사건에 대한 수습을 넘어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하면서 이를 타이완의 자치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는 '32개조 요구'로 구체화시켰다.

 

진압과 학살

국민당 군에 의해 학살당한 타이완 시민타이완 내의 병력만으로는 시위의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천이(陳儀)는 주민들을 상대로는 타협적인 제스처를 보이며 시간을 벌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장제스에게 대륙에 있는 국민당 군의 조속한 증파를 요청했다. 국공내전 중이었음에도 장제스는 폭동이 정부 전복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는 천이(陳儀)의 보고에 따라 38일 증원군을 타이완에 파견했다.

 

국민당 군의 증원군이 도착한 194738일부터 타이완에서는 대대적인 유혈진압이 시작되었다. 당일 새벽 두 시에 타이완 북부에 투입된 국민당 군 21사단은 곧바로 타이베이시에 진입해 시위대 진압을 개시하였다. 이로 인해 본성인 사상자가 속출하고 본성인 출신 지식인과 2.28 사건을 수습하고자 모였던 주민대표자들 상당수가 살해, 체포 또는 실종되었고 일부는 도망쳤다. 진압은 10여일간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졌고, 본성인(本省人) 3만명이 살해,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38일 가오슝(高雄), 311일 지룽(基隆), 타이난(臺南), 312일 자이(嘉義) 등에 진입한 국민당의 경찰과 계엄군은 타이완 본성인에 대한 무차별적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이러한 대규모 살육과 약탈은 317일 국방부장 백숭희(白崇禧)가 대만에 도착하여 조율에 나선 후 321일이 되어서야 진정되었다. 진압과정에서의 학살과 약탈로 인해 타이완은 섬 전체가 초토화되었고, 장제스는 '2.28 사건 처리 위원회' 인사들의 체포를 명령하고 위원회의 구성원 상당수를 처형했다. 결국 2.28 사건은 516일 장제스가 공식적으로 사태 종료를 선언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사건 이후

2·28 사건 공원내에 있는 2·28사건 기념관.이 사건은 사건 발생 후 40년동안 언급하는 것 자체가 타이완에서 최대의 금기로 여겨졌다. 국공내전에서 패퇴한 국민당정부는 194912월 타이베이로 옮겨왔다. 그러나, 내전의 패색이 짙던 194951일 타이완 섬 전체에 걸쳐 총호구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같은 달 21일에는 계엄령을 발표하였다. 그 해 말부터 위험분자로 간주된 이들이 대거 체포됐다. 타이완을 보위하고 대륙을 공격한다(反攻大陸)는 총 구호하에서 '내전을 반대하거나 국공 평화회담을 주장하거나 평화 건설과 민생 문제를 개선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이나 언론은 무조건 공산당 간첩, 파괴분자, 음모분자로 간주되었다.

 

1949521일 타이완 전역에 발포된 계엄령은 38년이 지난 1987715일이 되어서야 장징궈 총통의 명령으로 해제되었다. 계엄령이 지속되면서 금기 중의 금기가 되어버린 이 사건은 1988년 타이완 출신인 리덩후이가 총통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오랜 논란을 거쳐 1995년 리덩후이 총통이 국가차원에서 희생자 가족에게 사과하였고,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에는 중화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타이베이에 기념공원이 세워졌다.

 

아직도 2.28 사건 사망자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었다. 1991년 리덩후이 총통의 지시로, 이듬해 행정원이 발표한 2·28 사건 연구 보고에 따르면 2·28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3만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사건은 '타이완의 국부'격인 장제스가 직접 연루된 사건이라 논쟁이 끊이질 않고 있다. 실제로 사건 발생 60주년인 2007년에는 장제스가 이 사건의 학살을 지시했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왔다.[4] 타이완에서 진보성향이거나 민진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장제스를 기념하는 기념관인 '중정기념관'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5]

 

 

 

이번 타이베이 여행 전!! [비정성시]란 영화는 꼭 보고 싶었는데 ....

너무 오래된 영화이고, 찾지를 못했다!!

 

 

 

 

 

 

 

평일의 공원은 그날의 역사와는 관계없이 한가하다!!

소풍(?)을 나온 어린아이들의 천진함만이 있다!!

 

 

 

 

 

 

 

 

어제와는 달리, 쾌청한 날씨!! 상념에 잠겨 공원을 거닌다!!

마눌도 별 말이 없다!!

 

 

 

 

 

이들에게도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있겠지??

중국 본토와의 관계!! - 내부적 갈등!! 그들은 어떻게 해결해 가고 있을까??

우리 또한 내부적 갈등!! - 북한과의 관계!!

 

이런 비극적인 역사가 잘 조명되고, 다시는 이런 잘못을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마음이 무겁다!! 놀러 왔는디 ~~~

 

 

 

 

 

 

 

길 건너 총독부 건물도 보인다!!

역사의 비극들을 접어두면, 참 아름다운 건물이기도 하다!!

 

 

 

 

싫든 좋든 보고는 가야지!!

다시 MRT를 타고, 중정기념관으로 .... 한 정거장!!

 

 

 

 

 

 

중정 - 장개석!! 장제스!! 미안하지만 그렇게 썩 존경할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에 망설였는데 .... ㅎㅎ

또 계단 공사중이다!! ㅠㅠ

 

 

 

 

기념당 내부 - 그에 관한 역사들이 전시되어 있다!!!

 

 

 

 

 

 

 

 

 

자세히 알고 싶지는 않고, 미안 - 미안, 그냥 휘 ~~ 둘러보았다!!

그에 대한 대만인들의 평가는 어떤 것일까??

우리나라의 박** 누구와 참 많이 닮은 인물이다.

 

 

'중국, 일본, 대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대야시장과 대만대학  (0) 2012.06.07
융캉제  (0) 2012.06.06
타이베이 - 충렬사, 스토리하우스  (0) 2012.06.05
타이베이를 향하여  (0) 2012.06.04
타이베이 여행준비  (0) 2012.04.27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