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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카우나스 2

러시아, 발트3국

by 초보어부 2019. 8. 2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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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나스 성은 1030년에 빌리우스의 성터에 최초로 방어요새가 만들어지면서 지어지게 된 성입니다. 

그 후 14세기 고딕 양식으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계속되는 침략과 전쟁을 겪으며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하였고, 

현재 이성은 박물관과 아트 갤러리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카우나스 시에 해당하는 지역에 14세기 무렵 수운 교통을 이용하기 편리한 전략적 위치를 바탕으로 요새가 건설되었다. 요새와 수운을 바탕으로 14세기 한자 동맹 상인들이 머무르며 성당이 건설된 것이 카우나스 시의 시초가 되었다. 1408년에 도시는 마그데부르크 법의 혜택을 받게 되었으며, 1만여명의 인구가 거주했다고 한다. 리투아니아인들은 14세기에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으나 카우나스 인근 주민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건 조금 더 늦어서 15세기에나 개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카우나스에 새로이 건설된 고딕 성당에는 폴란드인 성직자들이 파견되어 카톨릭 뿐만이 아니라 서유럽 문화 전반도 전파하였다. 1441년에 도시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도시 중 유일하게 한자동맹의 일원이 되었다. 16세기에 이르면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카우나스 시에도 많은 학교와 병원들이 지어졌다.



1861년 카우나스 시에 철도가 뚫리면서, 카우나스 시는 독일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철도가 건설되고 새로운 이주민들이 러시아 제국 곳곳에서 유입되면서 도시의 리투아니아인 비중은 더 줄어들었다. 1897년 러시아 제국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에서 유대인은 도시 인구의 35.3%, 러시아인은 25.8%를 차지했지만 카우나스 시의 리투아니아인 인구 비율은 6.6%에 불과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대부분 카우나스 교외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시대에 뒤쳐진다는 위기의식을 느껴야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리투아니아가 독립하였을 때는 폴란드 제2공화국에 점령된 빌뉴스를 대신하여 리투아니아의 임시수도 역할도 했다. 이 상황은 1939년의 폴란드 제2공화국 붕괴 때까지 이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유대인이 도시 인구의 32%를 차지했고, 폴란드인도 30%를 차지하여 리투아니아인의 비중이 30%에 불과했으나 일시적인 나치 독일의 점령기간중 벌어진 홀로코스트 소련으로의 강제편입등의 격변을 거치면서 지금은 리투아니아인이 인구의 94%를 차지한다. 



출전 : 나무위키백과 





구도심에서의 축제를 보고 ~~~

카우나스성을 찾아왔습니다. ㅋㅋㅋㅋ

여기도 축제 중이군요!!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

체험하고, 참여하고 ~~~ ㅋㅋㅋㅋ 열심히 즐깁니다.






우리는 이방인!!

걍 구경만 ~~~~~~~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큰 네무나스 강과 네리스 강 사이에 위치했답니다.



모스크바에서 시작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거쳐서!!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

여기는 많이 덥군요!! ㅋㅋ


우리의 일정도 후반를 향해 갑니다.

이제 빌니우스(Vilnius)를 향하여 ~~~

푸조야!! 달려라!!


드디어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Vilnius)에 도착했습니다.

어젯 밤에 예약한 컴포트 호텔(Comport Hotel)!!

모던한 호텔, 젊은이들에게 잘 어울리는 호텔이군요!!

ㅋㅋㅋ 한 이틀만 머물 예정이지요!!

바로 앞에 큰 마트도 있고 ~~~

단 구도심(새벽의 문)까지는 약 15분 정도 걸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가성비로는 최고 입니다. ㅋㅋㅋ





구글지도가 잘 작동을 해서리 ~~~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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